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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6월 10일 \ 일제강점기 6.10 만세 운동

행복한우주먼지 2024. 6. 10. 23:01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 황제의 장례식에 일어났던 독립 만세 운동.

 

1926년 4월 26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승하하면서 조선 왕실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가서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사람들이 뭉칠 것을 우려한 일본 경찰들이 강제로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면서 일본 제국은 영친왕을 이왕으로 봉하고 항일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를 펼쳤다.

하지만 애국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다시 한 번 독립운동을 궐기하였으며 순종의 장례식인 6월 10일에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세 갈래의 독립운동 준비

3.1 운동과 같은 만세시위를 다시 한 번 전개하고자 한 천도교 조선공산당의 주도 하에 이뤄졌다.

권오설을 중심으로 운동지도부로서 '6.10 투쟁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시위의 전국적인 확산을 위해 순종 황제의 장례식에 서울에서는 학생을 중심으로, 지방에서는 장례식에 참석한 대중들을 결집해서 항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첫 번째로 권오설을 중심으로 한 노총 및 인쇄 조합원들의 만세 운동 계획이다.

 

원래 5월 1일에 하기로 했다가 순종 황제가 승하하면서 사태가 급변하자 장례일인 6월 10일로 변경하고 5만 매의 격문을 인쇄하여 천주교당에 숨기며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 무렵 중국의 돈을 위조한 사건이 일어나 일본 경찰이 인근 인쇄소들을 샅샅이 수색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이 계획이 발각되었다. 권오설을 포함한 17명의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어 계획은 실패했다.

 

다행히 나머지 두 갈래의 운동은 들키지 않고 활발히 준비할 수 있었다. 먼저 사직동계의 중앙고보(現 중앙고등학교)의 이선호, 유면희,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의 이병립, 박하균, 경성제국대학의 이천진과 YMCA의 박두종 등이 주도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6월 8, 9일에 걸쳐 태극기를 만들고 이병립이 격문을 작성하여 1만 매의 격문과 6천 장의 전단을 준비했다.

 

마지막 한 갈래는 통인동계인 중앙고보(現 중앙고등학교)의 이동환, 박용규와 중동학교(現 중동고등학교)의 김재문, 곽대형, 황정환 5명이 중심이 되어 통인동 71번지에 위치한 김재문의 집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계획 도중 본정에 폭탄을 던져 총독부를 파괴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만세운동으로 세계에 이 일을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보류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5월 29일에 이들은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라는 그 유명한 격문을 작성하고 5월 29일부터 5월 31일 사이에 김재문의 집에서 빌린 등사기와 김재문과 이동환이 구매한 재료를 이용하여 위 격문 5천 매를 등사하여 각 1천 매씩 나눠 가졌다.

 

한편 일본 경찰은 권오설의 독립 운동 계획을 알게 된 후 경계를 늘려 200명의 애국지사를 잡아들이고 청년 단체를 조사하였으며 심지어 조선총독부에서는 본국에서 군대까지 끌고 와 서울에 배치하고 부산항과 인천항에 군함을 배치했다. 학생들이 6월 8~9일에 걸쳐 격문을 나눠주는 과정에서도 경찰의 검문에 들킬 뻔했으나 격문 위에 일반 책을 얹어가는 재치를 발휘해 들키지 않았다.

 

 

만세운동이 벌어진 당일인 1926년 6월 10일 오전 8시 30분 일본 경찰, 헌병 외 5천 명의 보병, 기마병, 포병 등이 삼엄하게 지키던 가운데 당시 23세였던 이선호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에 따라 중앙고보생 100여명이 용감히 만세를 제창하고 격문 1천 장을 살포하며 태극기를 휘날린 것으로 노도와 같은 만세함성이 종로 단성사 앞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수교 부근에 도열해 있던 보성전문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전단을 뿌렸으며 이에 맞은 편에 모여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면서 시위가 확대되었다.

 

6.10 만세 운동에는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였는데 해외에서는 조선공산당 임시 상해부, 임시정부의 일부 세력, 임시정부의 외곽 조직인 의용대, 그리고 일본에서 유학하던 학생들까지 참가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천도교, 조선노동총동맹, 국내 학생운동조직 등이 참가해서 각 세력 간에 긴밀한 연대를 이뤄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일본 제국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200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을 체포했으며 일제 경찰은 추가로 계속 시위참가자를 체포했다. 이 중 일제 검찰은 이선호 등 11명을 주모자로 기소하고 재판에 넘겼다.

 

 이들은 항소하지 않았으나 검찰이 형이 적다고 항소하면서 이들은 감옥에서 추운 겨울을 나게 되었다. 2심은 이듬해 4월 2일 이선호 등 10명에게 징역 1년의 실형, 류면희에게는 만세운동 준비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면서 징 역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일본 제국의 반응과 의미

국내외 민족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더욱 큰 의미는 이념을 초월한 운동 세력의 연합에 의해 반일 민족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3.1 운동 이후 학생운동이 점점 조직화되어 조선학생회, 조선학생대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의 독자적 학생운동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이 6.10 만세운동의 중심세력으로서 수행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학생들이 독자적인 운동주체로 부상했고 이는 3년 뒤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년) 같은 주요 반일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