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 3월 13일 수요일
김마리아
한국의 독립운동가, 인권운동가, 교
1891년 6월 18일 출생
1944년 3월 13일 사망 (향년 52세)
한민족 출신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고모부인 서병호와 그 아들 서재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김규식의 부인이다.
역시 독립운동가인 김순애에게는 김마리아가 나이 어린 종고모가 된다.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필순은 그녀의 삼촌이고 김필순의 아들인 중국에서 활동한 미남 배우 김염은 김마리아의 사촌동생이다.
1891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도호부에서 부친 김윤방]과 어머니 김몽은사이의 3자매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이름인 '마리아'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아버지 김윤방이 지은 것이며 김윤방은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하여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를 세웠는데 김마리아가 어릴 때 사망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설립한 소래보통학교에 언니들과 다니면서 개신교 정신에 입각한 평등과 신학문을 배워나갔다. 1905년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근무하던 숙부 김필순은 나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노백린, 유동열, 이동휘, 김규식 등과 가까운 사이로 그녀는 김필순의 도움으로 숙부의 집에서 1906년 연동여학교를 다니면서 민족 정신을 갖고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낸 집안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1914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히로시마시를 거쳐 도쿄의 여자학원에서 수학했는데 1919년 도쿄여자학원 졸업을 앞두고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 선언이 일어나자 황애덕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곧이어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미리 귀국하여 황해도 지역의 운동에 관여했다가 체포 및 구금되었는데 이 때 고문을 당해 몸이 상한 뒤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하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귀국하면서 2.8 독립 선언문을 가져왔는데 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그 오비(허리띠)에 종이를 숨겼다고 한다.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이 되었으며 난징의 현재 난징대학의 전신인 진링(金陵)대학에서 수학하였지만 독립운동 대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에 식상한 그녀는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 위해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파크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녀는 뉴욕에서 다시 만난 황애덕, 박인덕(朴仁德) 등과 함께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3년 귀국하였으나 경성부에 체류할 수 없고 교사 활동도 신학 이외에는 가르칠 수 없도록 하는 등 일본제국 경찰의 제약이 뒤따랐는데 함경남도 원산부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썼다.
1943년에 오래 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원산의 사택에서 졸도한 뒤 1944년 3월 13일 결국 평양기독병원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유언대로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미혼이라 자손은 없으며 사실 결혼을 못 한 이유는 본인의 의지도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이유도 있었는데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취조를 받으면서 한쪽 가슴과 국부를 인두로 지지는 혹독한 성고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8p-eEWq4x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