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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4월 1일 월요일

행복한우주먼지 2024. 4. 1. 21:51

노덕술

 

1899년 6월 1일 출생

1968년 4월 1일 사망 (향년 68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한 경찰공무원으로, 경찰관 재직 당시 독립운동가 다수를 체포, 고문, 살해 악질 고문 경찰로써 악명을 떨쳤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 '고문귀' 하판락, '고문왕' 김태석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고문한 친일 경찰의 대표 격으로, 이러한 부역 행위에 따라 사후 친일인명사전에 반민족행위자로 수록되었다.

 

 울산 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다가 돈을 더 벌기 위해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일했다고 한다.

 

귀국 후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해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를 졸업한 후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 소속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했는데 사법계에 근무하면서 1921년에는 순사부장이 되었고 1924년 경부보, 1932년 경부, 1943년 경시로 진급하여, 1944년 수송보안과장에 임명되었다.

 

친일행적

그는 고등계 형사로서 악질 친일 경찰로 유명했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힌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 취조하는 데 앞장섰으며 후술하듯 고문치사한 사람까지 나왔고 고문 취조를 통한 건수 올리기로 일사천리로 승진가도에 올랐으며 일제로부터 훈8등서보 같은 수훈을 받았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민중들 사이에도 친일 고문 경찰=노덕술이라고 인식될 정도이며 그가 경찰로 지낼 동안 불렸던 별명 역시 일경의 호랑이였다고 한다.

그의 고문수법은 매우 악랄했는데 직접 새로운 고문을 고안하기도 했으며, 천장에 매달고 구타하기, 머리카락 뽑기, 이빨 뽑기, 손발톱 뽑기, 혀 뽑기, 코에 뜨거운 고춧물을 붓는 방식의 물고문, 비행기 태우기는 기본이고 전기고문이나 대못상자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얼마나 잔혹했으면 일제강점기에 경찰에서 전국의 고문기술을 총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70%가 그의 작품이라는 설이 맴돌 정도다. 후술하듯 노덕술 때문에 고문후유증으로 죽은 독립운동가만 무려 6명이다.

 

 

1927년 10월에는 좌우연합 단체인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 박일형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고, 1928년 10월에는 부산동맹휴교 사건으로 혁조회가 적발되었을 당시 혁조회의 회장 김규직을 비롯한 혁조회 간부 7명 등을 잡아들여 고문했는데 이때 혀 뽑기 등의 고문을 받았던 김규직, 유진흥, 양정욱 3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후에도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된 보통학교 교원들을 체포하여 고문하였고, 1929년에는 조선인 일본 유학생 강연회의 강연자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였으며 광주학생항일운동 참가자들과 관련자 석방을 주장한 동맹휴학 관련자들도 체포한 후 고문하였다. 

 

 

해방이후

 해방 이후 잠시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중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1945년 11월 9일 월남하였고 다음 해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하였다.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

 

1946년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 등 일당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았고, 이승만에게서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러는 와중에 독립운동가 중 최고 거물 중 한명이었던 김원봉을 체포, 김원봉에게 모욕적인 처우로 치욕을 주어 그가 월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49년 1월 26일 공범 백민태의 자수로 그가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동화백화점 사장 이두철의 집에서 검거되었는데 권총 6자루와 다량의 실탄, 현금도 34만 1천 4백 원을 가지고 있었다

 

 

반민특위 조사기록에 따르면 1949년 노덕술의 재산은 60~70만 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80킬로그램 쌀 8만 가마를 살 수 있고, 현재 시세로 하자면 1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모은 셈이다. 순사부장 시절부터 부패한 면모를 보여줬단 것을 감안하면 부정축재로 모은 재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노덕술은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바로 경기도청 경찰국의 주임으로 영전했고, 이후 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였으며1950년에는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1954년 부산 제2육군 범죄수사단장, 1955년 서울 15육군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내는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로 대공수사 업무를 담당했다. 참고로 9.28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에 있던 인민군 부역자 처리 과정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몰락

그러다가 불행 중 다행히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노덕술의 부귀영화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노덕술은 특무대장 김창룡과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다 이승만 눈밖에 나면서 날개가 꺾였고, 1955년 11월에는 밀수에 가담했다는 것이 발각되어.

 

 동월 11일에 재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전급료 몰수를 선고받았다. 1958년에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에 공천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노덕술은 낙선 3개월 후인 1960년 9월에 일본으로 망명한 선우종원이 귀국하자 선우종원을 찾아오고는 초라한 행색에 약간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나고는 보자기를 풀어 국제 공산당 사건 관련 브리핑을 전달하고는 홍택희라는 사람이 이렇게 나쁜 짓을 했으니 잡아 없애라고 부탁을 하며 마지막 권력의 끈을 잡으려고 했으나, 선우종원이 의연한 반응을 보이며 계획은 무산되었다.

 

 1965년 6월에 뜬금없이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당하기도 했다.

 

사실 1965년 5월에 서울의 한 흥신소에서 서울지검 검사였던 함정호를 미행하던 사건이 발각되자 검찰이 서울의 흥신소를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와 함께 여러 불법 흥신소들이 적발되었으며, 흥신소 장부를 열어보니 반 이상이 개인을 미행하는 등의 사생활 침해로 채워져 있어 물의를 빚었다.

 

놀랍게도 함정호를 미행하던 흥신소가 바로 노덕술이 사장으로 있던 흥신소였다! 

 

이는 노덕술이 몰락한 후에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얼마나 안하무인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며, 해방 후에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을 역임하며 '부통령급' 위상을 가졌던 데다가 헌병 중령까지 보냈던 사람이 불법 흥신소를 운영하며 검사를 미행하다가 구속되는 꼴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노덕술이 얼마나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지며 완벽히 몰락했는지를 보여준다

 

노덕술은 1968년 4월 1일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에서 향년 68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나마 말년에는 사회에서 매장되고 잊혀진 채 가난하게 살다가 쓸쓸히 죽으며 생전 악행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업보는 치른 셈.[24][25]

 

 

* 노덕술의 생가는 지금도 남아 있다. 2010년대 중반까지는 노덕술의 친척뻘 후손이 살다가 오늘날에는 회사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 강우규 의사를 체포했던 '고문왕' 김태석의 후예가 바로 노덕술이다. 이후 노덕술의 잔혹한 고문기술은 제5공화국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까지 이어진다. 

 

* 또 다른 일제 고문 형사였던 하판락과도 친한 사이였다. 하판락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와 인터뷰에서 노덕술은 재주가 있어 일본 노래를 잘한다고 말하였고 술좌석을 잘 어울린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특히 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노덕술과 하판락은 해방 이후에도 인맥이 있었는데 서대문에 같이 있다가 반민특위에 체포된 후에도 마포 형무소에서 같이 있었다고 알려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qnWRzBIbS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