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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4월 4일 목요일

행복한우주먼지 2024. 4. 4. 17:06

현미

 
1938년 1월 28일 출생 (스타다큐마이웨이에서 37년생이라고 밝힘)
2023년 4월 4일 사망 (향년 85세)
 
대한민국 가수.

재즈풍 보컬을 통해 한국형 팝을 선도하였던 인물로, 1957년부터 현시스터즈로 데뷔한 뒤 1962년 <밤안개>가 수록된 1집 앨범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주로 이봉조의 곡을 불렀다
 

유년기

 
1938년 1월 28일, 평안남도 평양시 박구리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8~9개월 때 우량아 대회에 나가 상을 탈 만큼 체격과 건강 상태가 좋았다고 한다.

언니이자 노사연의 어머니인 김화선은 최승희의 1기 문하생 출신으로, 현미는 이런 언니의 영향을 받아 무대에 서는 일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또한 직접 콩쿠르 대회에 나가 상을 탈 정도로 명망있는 가수였다. 원래 현미는 노래가 아닌 언니인 김화선의 영향을 받아 무용을 좋아했고, 매년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1945년 해방 직후 소련이 한반도 북반부를 점령하면서 3년 뒤 북한 정권이 세워지게 된다. 이듬 해인 1949년, 당시 경림인민학교 4학년생이던 현미는 소년단 단장으로 뽑혀 평양 시내에서 선전 선동 시위에 동원된 적도 있었다.
 
단장이었던 현미는 시위대와 함께 '이승만을 때려잡자! 미제는 물러나라!' 등 선전 구호를 외쳤는데, 훗날 남한으로 피난온 뒤 이 시위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었다
 
 또 현미는 김일성을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평양시청 앞에서 열린 공산당 환영행사에 동원된 현미는 공산당원 간부 한 사람으로부터 무대 위 단상에 앉아있는 커다란 체격의 남자에게 꽃다발을 주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꽃을 받자 환하게 웃었던 남자가 바로 김일성이었던 것이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듬 해 1.4 후퇴가 일어나면서 평양을 탈출해 대구까지 300km가 넘는 긴 피난길에 올라 월남했다. 당시 평양에 살던 집이 망가지자 부모가 두 여동생을 10km 떨어진 강동에 위치한 조부모댁에 맡겼는데, 부모는 피난 갈 체비가 끝나면 자녀 2명을 데리러 오려고 했지만 중공군이 빠르게 남하하면서 결국 현미의 두 여동생은 북한에 남겨지게 된다.
 
현미의 여동생은 가족들이 떠난 이후 부모가 남겨놓은 이불에서 부모의 채취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하며,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공산당 간부들이 조부모님 댁을 차지하고 두 여동생을 내쫓는 바람에 길거리에 고아로 남겨졌다고 한다. 다행히도 두 사람을 불쌍히 여긴 학교 선생님이 이들을 거두어 숙식을 제공했으며 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로동당 당원이 되어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998년 MBC가 주최한 남북이산가족 상봉 특집에서 현미의 가족들과 헤어진 여동생 중 1명인 길자씨는 2박 3일간의 만남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기 이전이라 정부 차원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민간업체 주선으로 $5000을 내고 이들을 만났다고 하며, 평양이 아닌 중국 장춘시에서 이들과 접선했다.
 
두 여동생은 너무 굶고 고생을 하서 발톱이 다 빠져있는 등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가족들 앞에 모습을 들어냈고, 호텔에서 함께 잠을 잘 때 현미에게 "언니... 다 좋은데 배고파서 못 살겠어"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이후 언니 김화선이 김화선 무용연구소를 차리자 여기서 시간을 보내며 무용을 더 배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화선은 결혼과 함께 친정 식구들과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현미는 홀로 서울에 남아 덕성여대 가정학과에 입학하게 되며 자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용돈벌이 삼아 김진걸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우며 활동하던 현미는 당시 작곡가 김희조 선생을 만나 미 8군 무대에 출연해 학비를 벌어볼 생각이 없냐는 제의를 받았고, 당시 보수가 일반 사무직보다 후했기 때문에 현미는 이 제의를 받아 이난영이 단장으로 있던 김시스터즈의 무용수로 취직하게 되었다.
 

미8군 데뷔

 
1957년 미8군 위문 공연 무대 칼춤 무용수로 취직해 활동하던 현미는 우연히 방송을 펑크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첫 무대에서 아 목동아!와 베사메 무초를 연달아 불렀는데 미군들의 반응이 뜨거워 악단장의 제의로 월급을 3배로 받는 조건으로 현시스터즈를 결성하게 된다. 사실상 데뷔곡인 셈. 당시는 드물게 있었던 여대생 가수라는 메리트를 살려 그룹의 센터를 담당했다. 그 외에도 솔로로 '벨라'라는 예명으로 주로 팝을 부르며 무대에 서는 일도 잦아졌다.
 
현미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미도파 백화점 옆에 있던 재즈카페 은성살롱에 현시스터즈가 특별 출연하면서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본명이나 벨라로 활동했으나, 우연히 손석우 선생과 현인 선생이 미8군 장교클럽에서 당시 현미에게 '학생은 어떻게 그리도 노래를 잘 부르는가?'라는 격려를 받고 큰 용기와 부담을 안고 당대 최고 가수였던 현인의 현을 따서 현시스터즈 모두 현미, 현애, 현주로 '현'을 돌림으로 예명을 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예명이 '현미'이다.
 
미 8군 무대에서 당시 드물었던 여대생 프리미엄으로 현 시스터즈의 센터로 인기몰이를 했고, 진석규 단장이 상당히 아꼈다고 한다. 그러다 당시 밴드 마스터였던 이봉조를 만나게 되었고 이들의 관계가 가까워질 것을 우려해 진석규 단장이 둘을 갈라놓으려하다가 이걸 알아챈 이봉조의 권유로 현미는 진석규 단장과 결별했다고 한다.
 
이후 이봉조의 아이를 갖게된 현미가 출산과 더불어 일을 쉬게 되었고, 수입이 끊겼던 현미는 당시 미 8군 쇼 기획업체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던 화양 프로덕션에서 '세계의 휴일'이라는 라이브 쇼에 출연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최희준과 같이 무대를 서게 된다. 이때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유명한 의사 가문의 아들이 현미에게 호감을 느껴 몇번 동행을 제의했는데, 당시 이봉조와 연인관계였기 때문에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그가 후에 쓰리 보이로 명성을 날린 신선삼이라고 한다. 후에 그가 현미에게 '그 때 너무 멋있어서 납치하려고 했어요'라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국제가요제

 
당시 주로 이봉조가 만든 노래만 불렀던 현미는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한국 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 중에서도 이봉조가 해외 국제가요제 출전에 집중하던 때에 제 4회 그리스 국제 가요제에 현미와 함께 출전해 '별'로 주요부문에 수상하며 국내외 중저음의 허스키한, 강한 성량의 보컬 능력도 인정 받았다.
 
이러한 경력을 인정받아 미국 레이건 대통령 취임 파티에 초청받아 한국 대표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인지도가 전무했던 동양인 중년 가수가 한복을 입고 미국의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자 연달아 기립박수와 앵콜이 이어져 계획했던 것보다 더 다양한 곡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공연은 주로 가스펠 위주로 불렀다고 한다. 무대반응이 너무 뜨거워 취임 파티 이후에도 주변에서 현미를 계속 찾았고 미국 체류중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전성기 이후

70년대 후반부터는 이봉조와의 관계 청산과 더불어 가수 생활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엄앵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엄앵란의 이름으로 쇼를 진행해 현미가 게스트로 참여하거나 무대를 중개해주는 등 엄앵란의 도움으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돈을 벌기위해 야간업소를 하루에 여덟 군데씩 뛰어다니며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일했어야 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한명숙 최희준 등과 함께 폐국 전까지 TBC 동양방송 전속 가수로 활동했으며, 국내 최초로 '현미 노래교실'을 만들어 연달아서 성공가도를 달렸고 예능 출연을 통해서 재치있는 입담을 선보이며 다시금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봉조


그러다가 사실상 이봉조의 유작인 1991년 '왜 사느냐고 묻거든'과 2001년 '아내'를 발표하며 히트시켜 현미 독자적으로 가수로서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이봉조의 곡들이 워낙 많았고, 주로 이봉조와 협업을 했기 때문에 다른 작곡가들의 곡을 부를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느새부터인가 곡을 줘도 불러주지 않기 때문에 작곡가들이 곡을주지 않았다고 한다. 91년 '왜 사느냐고 묻거든'에서 다른 작곡가들의 곡들을 데뷔 앨범이래로 처음 불렀다고 한다. 2001년 '아내' 앨범은 중년 여성들의 삶을 담은 노래를 담았고, 수록곡들은 주로 본인이 운영하는 노래교실에서 다른 가수들의 곡들 중에 주부들이 애창하는 곡을 추려서 편곡하고 녹음했다고 한다.
 
 

사망

 
 
 
 
 2023년 4월 4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7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본인의 자택에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 김모 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장례는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지며, 큰아들 이영곤 씨에 따르면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 후 미국에 안장될 것이라고 밝혔다. 생전에 나중에 죽게 되면 미국에 있는 이모 옆에 안장되고 싶다고 tv에서 여러 번 밝힌 바가 있다.


https://youtu.be/KDU62Tgp8E4?si=gw0ssAAtBLawqhH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