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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4월 11일 목요일

행복한우주먼지 2024. 4. 11. 23:52

김현승

1913년 4월 4일 출생

1975년 4월 11일 사망 (향년 62세)

 

대한민국 시인

 

1913년 4월 4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6세까지 부친의 목회 첫 부임지가 위치한 제주도 제주읍에서 성장했다.

 

7세 이후에는 전라남도 광주로 이주해 숭일학교 초등 과정을 수료했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1936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해 문리과를 3년 다니다 1년을 남겨두고 병환으로 중퇴했다.

 

이후 조선대학교 교수로 1951년부터 8년간 재직하다 임종까지 모교인 숭실대학교 교수로 지냈으며 1970년 한국문인협회의 학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34년 숭실전문학교 재학 당시 장시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이 양주동 당시 숭실전문학교 교수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게재되면서부터 등단하였다.

 

이른바 눈물과 보석과 별의 시인이다.

 

1932년 숭실전문학교 의 교사로 있던 양주동, 이효석의 강의를 들으며 습작에 몰두하였으나 1933년 위장병으로 부득이하게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고 부모가 있는 광주에 다시 내려가 요양을 하였다.

 

몸을 추스린 후 복학하여 시 작업에 몰두하는데, 겨울방학이 되어서도 기숙사에 혼자 남아 밤이 늦도록 시를 썼다고 한다. 그때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등의 시들을 학보인 <숭실>에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양주동의 눈길을 끌어 1934년 동아일보의 문예란에 발표하여 그 당시 관례이자 관행이였던 신춘문예나 잡지 추천제도에 상관없이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1935년 조선시단, 동아일보, 교지를 통해 <유리창>, <철교> , <이별의 시> , <묵상수제>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 무렵의 시는 식민지 시대의 고통받는 민족의 비애를 낭만적인 이미지로 자연을 예찬하고 인간의 탐구정신을 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시어들은 지나치게 세련되고 지적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의 성향을 보였고 같은 해 비평가 홍효민은 김현승을 "혜성처럼 나타난 시인" 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정지용 , 김기림 , 이태준 등도 그에게 격려와 찬사를 보내어 이름이 시단에 일찍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뒤에 광주에서 박흡, 장용건, 손철, 이동주 등과 계간지 <신문학>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1951년 4월에 조선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자신의 4살 아들이 병을 얻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물자 빈곤, 그리고 가난 때문에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잃게 되었고 이 비극은 그의 시 <눈물>에서 애통함을 엿볼 수 있다. 1955년에는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으로 피선되었고 제1회 도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73년 <김현승 시집전>을 출간하고, '서울시문화상' 예술부문을 수상한다.

 

3월 하순, 차남의 결혼식을 치르고 고혈압으로 쓰러져 한달만에 회복하였고 이 뒤로 신앙에 몰두하여 병원과 교회를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다시 숭실대학교에 강의를 나갔다가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 도중 쓰러지며 서대문구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