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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5월 18일 토요일 > 이육사

행복한우주먼지 2024. 5. 18.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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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5월 18일 (음력 4월 4일)

1944년 1월 16일 (향년 39세)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시인.

 

윤동주, 한용운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유명하다.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1934년 육사와 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 동기인 처남 안병철(安炳喆)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들어간 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한 자백으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죽거나 다쳤다.

 

이 일 때문에 이육사는 크게 분노해 안병철의 뺨을 때린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6장이나 되는 편지를 보내 더러운 피의 일족(부인 안일양을 지칭)인 사람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 데려가라 전했다 한다.

 

심지어 그 일 이후 무려 7년 동안이나 본가에 들러도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잠은 여관에서 잤다고 한다.

 

어린 시절 소학을 배우는 등, 한학을 공부하다가 1916년 보문의숙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이 경험으로 그는 훗날의 창작 활동에서 한학을 배운 흔적이 보인다.

 

졸업 후 1920년 가족들이 모두 대구부 남산정(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662번지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그리고 19살 때 영천군의 사립 백학학원(白鶴學院)의 교원으로 9개월간 근무하였고 1924년 4월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킨죠(錦城) 예비학교를 1년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5년 8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하여 중국대학(中國大學)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1930년 1월 3일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이때 후에 교보생명을 창업하게 되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나아가 교육보험사업에 설립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31년 4월 만주국 펑톈으로 가서 의열단 핵심단원 윤세주를 만나 의열단 입단을 권유받고 곧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교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웠으며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1933년 4월 졸업 후 7월경 귀국하여,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했다.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934년 3월, 의열단 및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검거된 뒤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7월에야 기소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가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둘째동생 이원창과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이병희가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 안동시에 이장됐다.

 

1968년에는 안동시에 그의 시비가 건립됐다.

 

 

 

 

여담

전체적으로 그의 시를 평가하자면 윤동주가 부끄러움과 반성, 기독교적 희생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이육사는 남성적이면서도 목가적인, 그리고 극한에 서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표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육사의 시가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해서 수능에 나오면 난이도가 쉽다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딱 쉬운 난이도의 해석으로만 유도하는 고교 교육과정까지만 통하는 소리다. 이육사의 시는 상징적인 시어가 많아 의미 자체를 해석하기 어려워 이육사의 시 앞에서는 자동으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 

 

  •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애국,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39여년의 인생 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자야곡>>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라 치쟎으면 못살이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 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맘에 들리라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