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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3월 10일 일요일

행복한우주먼지 2024. 3. 10. 11:49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김산

1905년 3월 10일 출생

1938년 10월 19일 사망 (향년 33세)

 

일제강점기에 신흥무관학교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 중국공산당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앞장섰었다. 시인으로도 활동하였다.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 출신으로 본명은 장지락(張志樂) 또는 장지학(張志鶴)이다.

 

11세 때인 1916년 가출하여 친구 친척네 집에서 지내며 공부를 하다가 중학교 입학 시험을 쳤으나 불합격했다. 그런데 길을 가다 먼저 가출했던 둘째 형을 만나 형네 집에 가서 얹혀 지내며 살았다. 이후 중학교 입학 시험을 다시 보아 합격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1919년 중학교 시절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3일간 구류되었다.

 

 

#일본유학

김산은 둘째 형이 준 돈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김산은 친구 한 명과 방을 빌려 매일 아침 신문을 배달하는 일자리를 구하면서 도쿄제국대학에 응시할 준비를 한다.
 
김산은 학교가 끝나면 매일 4시에 일을 했고, 일본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헌 책을 사기도 했다. 일본에 있는 부유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김산과 같은 힘들게 일하는 부류의 유학생들을 '룸펜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르면서 놀렸지만, 김산과 그의 친구들은 오히려 부유한 한국인 유학생들을 '달걀 껍데기'라고 부르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산은 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일제 군경과는 달리 글로벌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놀랐다.

1923년 관동 대학살을 목격한 김산은 큰 충격을 받는다. 이 때 당시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일본 대신 중국으로 갔는데, 김산도 이들 중 하나였다. 김산은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소련으로 가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중국활동

1920년 겨울 상하이에 도착,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 교정과 식자로 활동하였다. 1921년 일본을 거쳐 잠시 지내다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쑨원이 세운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 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운 것을 계기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한다.

1925년 7월 광저우로 가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5년 중국 대혁명에 참가, 다음해 조선혁명청년동맹 조직위원회의 기관지 <혁명동맹> 부주필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양 민족 연맹을 결성하였다.

1927년에는 황포 군관학교에서 교관을 맡는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났다.

 

이어 공산당 북부 지구 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중 결혼해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1938년 캉성의 지시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983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 조직국에서 김산이 일본의 간첩임과 사상 변절자라는 근거가 없고 올곧은 인물이었음을 인정받아 사후 45년 만에 공식적으로 명예가 회복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에 김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200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 기념식 때 중국에 사는 그의 외아들 고영광을 초청하였다.

2018년 8월 15일에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중한국대사관에서 열린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여했다.

 

#김산아들명예회복노력

“67년 만에 아버지의 혼이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인 작가 님 웨일스 소설 ‘아리랑(Song of Arirang)’의 주인공인 좌익계열 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 그가 ‘트로츠키파 일제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중국공산당에 처형당해 순국한 지 67년. 그의 아들 고영광씨(68)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아버지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에 맞춰 한국에 왔다.

 

고씨는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일본과 중국 국민당의 자료를 뒤졌다. 그는 ‘장지락은 번복시킬 수 없는 자다’라고 기술된 일본 경찰 문서를 찾아내기도 했다.

이에 자신감을 가진 고씨는 1978년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 달라고 중국공산당에 탄원했다. 5년 만인 83년 고씨는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로부터 ‘김산의 처형은 잘못된 조치다. 그에게 덮어 씌워졌던 불명예를 제거하고 그가 지녔던 명예를 모두 그에게 되돌린다’는 결정을 받아냈다. 고씨는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이었던 후아요방(胡耀邦)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독립운동가 김산이 저희 아버지인 사실을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일본 첩자란 누명을 썼으니 어머니(조아평·趙亞平)도 아버지를 꼭꼭 숨기고 사실 수밖에 없었지요.”

 

고씨의 어머니는 “아들 이름을 ‘영광’이라고 지으라”며 보낸 아버지의 편지조차 읽고 없애버려야 했다. “어디서 돌아가신지도 모르는데 당연히 아버지 김산의 유품은 한 점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유품 대신 혼을 남겨주신 거지요.”

김산은 아들을 낳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1937년이었다. 김산은 그 해 님 웨일스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그녀에게 구술했고 그녀에게 아리랑을 들려줬다. 그리고 그 다음해 가을, 김산은 짧은 33년의 인생을 마감한다. 님 웨일스는 41년 미국에서 ‘한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라는 부제를 붙여 ‘아리랑’을 출간했다.

 

<님웨일스>

님 웨일스는 남편 애드거 스노와 함께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서양 언론인으로, 1937년 옌안에서 취재한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열정적인 삶을 소설 <아리랑>(송 오브 아리랑)으로 남겼다.

 

1997년 별세한 뒤 2005년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빼어난 미모로도 이름났던 그는 1991년 미국 워싱턴에서 고석만 피디를 만났을 때 사진 찍기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 

 

 웨일스의 미모는 ‘세기의 스캔들’을 뿌렸었다. 마오쩌둥이 가장 신뢰했던 외국인 에드거 스노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다. 작품의 향기보다 더 짙은 건 ‘김산에 대한 그의 사랑’이었다. 그의 글에서 감지되었던 이성적인 사랑의 감정이 몇십년이 지난 그때 그 순간에도 느껴졌다. 감동이었다.

 

1937년 옌안에서 김산을 인터뷰한 님 웨일스는 38년 그가 처형당하자 39년 필리핀에 머물며 <아리랑>을 집필해 41년 뉴욕에서 출간한다. <송 오브 아리랑> 초판본(사진)은 전 세계 50권 정도만 남아 있고 국내에는 유일하게 아리랑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kH743UOLm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