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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2월 24일 토요일

행복한우주먼지 2024. 2. 25. 08:26

1929년 2월 24일 탄생 

김일 (한국 프로레슬러)

 

한국 프로레슬링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로, 1970년대의 한국 프로레슬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김일 밖에 기억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프로레슬링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중적으로 성공한 무적 선역 기믹의 프로레슬러였다. 

 

피니쉬 무브로 특유의 헤드벗인 외다리 원폭 박치기가 유명하며 이 때문에 "박치기왕"이라는 애칭이 있었다.

 

역도산(재일교포)의 제자로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도 활동했다.

 

젊은 시절에 무작정 일본으로 밀항하여 형무소에 갇히는 고초를 겪다 편지로 연을 맺은 역도산의 제자가 되었다.

역도산이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에게 부탁을 하여 김일은 형무소에서 풀려날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역도산의 제자가 된 계기가 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김일이 일본행 밀항선을 탔다가 체포되어 형무소에 복역하던 도중에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러가 되고 싶다." 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김일이 역도산의 집 주소를 몰라서 그냥 "日本 力道山" 이라고 썼는데 무사히 역도산에게 편지가 도착했다고 한다.[5] 그리고, 김일이 석방된 뒤에 연락이 되어 역도산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오오키 킨타로(大木金太郎)라는 링네임으로 활약했으며 박치기를 필살기로 삼았다. 전성기 시절 역도산의 단체 일본 프로레슬링(JWA)에서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와 함께 젊은 삼총사(若手三羽がらす)로 불리는 등 거물로 손꼽혔다. 

 

 스승 역도산이 1963년 시비가 붙은 야쿠자를 두들겨패다 칼에 찔려 허망하게 사망한 이후 일본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한국으로 귀국하여 이후 대한 프로레슬링의 에이스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 역도산이 세운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에서 안토니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 등 간판스타들이 이탈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참전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김일은 "스승님의 단체인 일본 프로레슬링을 저버릴 수는 없다!"는 이유로 일본 프로레슬링을 끝까지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일본 프로레슬링은 방송권을 전일본 프로레슬링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모두 빼앗겨 TV 중계가 전혀 되지 않는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결국 몰락하고 만다.

 

1989년 고혈압 투병 이후 선수 생명이 끝난지 오래인 1995년 4월 2일 6만 관중이 모인 도쿄돔에서 일본 은퇴식을 가졌다.

 

 

잠시 라이벌이기도 했던 전설 루 테즈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입장, 스승인 역도산 등과의 일화를 이야기 한 뒤 최후의 10카운트 공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립 링포스트를 몇 차례 두드린 뒤 링을 뒤로 했다.

 

 

김일은 일본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일본식 이름을 쓰면서도 언론에서는 그를 “한국의 맹호”라고 칭하고, 한복을 입고 링에 등장하는 등, 스승 역도산과 달리 한국인 정체성을 아예 숨긴채 살아간건 아니었기에, 그가 한국인이라는건 당대에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야기

  • 한국프로레슬링연맹의 대표를 맡았고, 한때 개그맨 백재현의 프로레슬링 사부를 맡아 이름을 날린, 지금은 고인이 된 이왕표가 김일의 제자였다. 
  • 고향인 전남 고흥군 거금도에는 김일 기념 체육관이 있다.
  • 이곳에는 김일의 일생과 살아생전 사용했던 물건들이 전시되어있다. 고흥반도에서 소록도를 거쳐 거금도로 들어가는 다리가 있기 때문에 차타고 가면 편하다. 또다른 일화로는 김일이 당대 최고 프로레슬러로 활동하던 시절, 권투와 프로레슬링 팬이던 박정희가 김일을 초청하여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고향에 전기와 수도시설을 놓아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때문인지 거금도는 섬이라는 지형상 전기와 수도시설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금산면은 섬 중에선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온 곳이라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D7GlAoas6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