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3월 6일 출생
사진가 최민식
1928년 황해도 연백군의 가난한 소작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작가의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집에서 도장을 파며 돈을 벌었고, 나머지 일곱 식구는 소작을 하거나 나무를 하면서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최민식 작가의 아버지는 최민식 작가에게 성 빈첸시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주었고, 그림을 잘 그렸던 작가에게 장 프랑수아 밀레처럼 가난한 서민의 모습을 그리라는 조언도 해 주며 최민식 작가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민식 작가가 15살이 되던 1943년, 작가의 아버지는 작가에게 손재주가 좋으니 도회지로 나가서 돈을 벌어보라고 권유했고 최민식 작가는 평안남도 진남포에 있는 미츠비시 기능자 양성소에서 2년 동안 기술을 배운 후 비행기 날개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노동자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염소가스를 들이마시며 일을 해야 했다.
그 때 공장의 염소가스가 어찌나 독했던지 면 작업복이 하루만에 삭아서 닳아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만약 오랫동안 일했더라면 목숨이 위험했을 지도 모르지만 하늘이 도와서인지 2년만에 해방이 찾아와 최민식 작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그림 공부를 위해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던 작가는 값비싼 학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낮에는 식당에서부터 인쇄소, 제과공장 등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밤에는 미술학원 야간반을 다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3년간 병참부대의 철도대대에서 부사관으로 군복무를 하게 된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군복무를 마친 작가는 결혼을 하고 나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처남과 함께 모직공장에서 일하게 되지만, 미술에 대한 열망을 잠재울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아내와 처남에게 일본 유학을 떠나겠노라고 선언하게 된다.
다행히 아내와 처남은 작가의 일본 유학을 지지해주었고 특히 처남은 그가 일본으로 떠날 수 있도록 작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1955년 일본으로의 밀항길에 오르게 된다. 어두운 새벽 영도에서 16명의 사람과 함께 작은 어선으로 일본 규슈에 도착한 작가는 규슈에서 도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최민식 작가의 일본어는 유창한 편이었지만 일본인과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기에 검문에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기차 안에서 어느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
도쿄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학비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았고, 도쿄의 식당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그 식당 주인의 딸이 도쿄중앙미술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던 미술학도였고 식당 주인딸의 도움을 얻어 도쿄중앙미술학원 야간부에 입학하게 된다.
아무래도 식당에서 버는 돈만으로는 미술학원 학비를 대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그는 학원 동기들과 손수레로 폐품을 모아 팔면서 돈을 버는 등의 일을 병행하면서 학비를 마련했다.
낮에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자금에 여유가 생겼던 작가는 돈이 생길 때마다 헌책방에 들러 책을 사기 시작했다. 바로 그곳에서 작가는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작가 曰 반세기 동안 사진에 미쳐 카메라를 둘러메게 만든) 작품인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사진집 <인간가족>을 만나게 된다.
#일본 유학 이후
인간가족을 보고 사진에 푹 빠지게 된 그는 헌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다가, 1957년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후 미국인 신부가 운영하는 고아원 '소년의 집'에서 전속 사진사로 고용되면서 본격적인 사진가로써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사진작가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인생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내며 부산 서민의 모습, 특히 자갈치 시장의 서민들의 모습을 사진 속에 많이 담아냈는데, 이 때문에 자갈치시장 사람들이 그에게 자갈치 아저씨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그 당시엔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필름은 주한미군부대의 지인을 통해서 구해야만 했고 인화지는 일본에서 밀수한 것을 사서 써야만 했다.
또 사진 실력을 키우려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며 사진기법을 공부해야만 하는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해외 사진집을 구하기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국 작가들의 사진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는 제지공장 사장에게 부탁해 미국에서 수입해온 폐지를 뒤져야만 했다. 폐지를 뒤지면 제일 많이 나오는 잡지가 라이프였다고.
하지만 한 주제만을 고집해온 그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어서 1962년 대만 국제사진전을 시작으로 수많은 국제 사진전에서 그의 작품이 입상하게 된다. 특히 1967년 영국 사진연감에서 그에게 카메라계의 렘브란트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으로 시작해서 빛의 사진작가, 가장 한국적인 사진작가 등의 호평이 쏟아지게 된다.
국내에서도 1963년 제1회 동아 사진콘테스트 입상을 시작으로 다음 해 한국 국전에 입상하게 되고, 1969년 국내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968년 동아일보를 통해 그의 첫 사진집 인간' 1집이 나오게 된다.
#어려운 시절
그의 사진은 팔리지 않는 사진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높으신 분들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 작품이었다. 한강의 기적 뒤에 숨겨진 대한민국의 어둡고 가난한 모습을 왜 자꾸 들춰내서 국제적으로 망신을 시키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최민식 작가는 작품활동을 그만 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최민식 작가는 독재정권이 끝나고 민주화 시대가 오기까지 독재정권 하에서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아야만 했다.
정부는 전방위로 그를 압박해왔다. 작가가 생계유지를 위해 운영한 사진관에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손님이 뚝 끊기고 말았다.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작가였기에 중앙정보부에 셀 수도 없이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는 유럽의 7개국에서 총 20여회의 사진전을 개최하는 영광을 받았지만 정작 정부에서 여권을 주지 않아서 자신의 사진전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한밤중에 집에 쳐들어와 구둣발에 온 집안을 헤집어놓는 것은 예사였다. 때론 해외여행을 보내주겠다거나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등 정부에서는 온갖 회유책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가 평생을 지켜온 인간이라는 주제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날 한창 사진을 찍고 나서 몸을 녹이고자 들어간 다방에서 갑자기 동네 순경이 들이닥쳐 그를 끌고 가는 일은 예사였고 심지어는 그가 반평생을 살아온 부산의 자갈치시장에서조차 간첩 신고를 당해 동네 경찰서로 끌려간 적이 있었다.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심지어는 1967년 울릉도에서 북한 간첩이 체포되었을 때 간첩의 소지품에서 하필이면 그의 사진집이 나와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적도 있었다. 만약 사진집에 싸인이라도 있었으면 아마 큰 고초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작가도 소식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민주화 이후 봄날이 찾아오다
민주화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한 그는 1986년부터 인도나 네팔, 유럽 등 다양한 나라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등의 새로운 시도에 도전한 한편, 대한민국 사진계의 1세대이자 거장으로써 지역사회에서 정기적으로 사진 특강을 개최하거나 여러 대학에 출강을 나가는 등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높이 기려 2000년 옥관문화훈장을 수여하였고 이어 국내 사진전에서 봉생문화상, 대한사진문화상, 백조사진문화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계속해온 결과 2010년 인간 14집을 출간하였고 모 인터뷰에서는 15, 16집에 대한 계획도 다 세워놓았다며 죽기 전에 아프리카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고 밝히는 등 사진에 대한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2013년 2월 12일 부산의 대연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85세. 장지는 국립영천호국원이다.
1세대 다큐 사진작가
https://www.youtube.com/watch?v=P7oytykwc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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