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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3월 26일 화요일

행복한우주먼지 2024. 3. 26. 18:10

1910년 3월 26일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인 안중근 의사가 일본 제국에 의해 사형집행이 되어 순국했다.

1879년 9월 2일 출생

1910년 3월 26일 (향년 30세) 사망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 운동가이자 군인이며 독립운동가, 평화적 아시아주의자.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유관순김구안창호이봉창윤봉길여운형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저명한 독립운동가다.

본래는 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사업 등 민족의 계몽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의군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장군격인 참모 중장으로 활동했으며, FN M1900으로 초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하는 의거(義擧)를 단행하였다. 체포된 후 옥중에서 많은 휘호를 남기고 자신의 사상을 논하는 글인 동양평화론의 서문을 저술하다 사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쳤다.


안중근은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고 하여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다.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고 사격의 명수였는데 놀랍게도 기계로 쏴도 명중률이 고작 50%인 화승총으로 20보 (약 10m)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혔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 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 (박영효의 장학생)이 좌절되자 7살의 안중근과 함께 일가 친척들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 (현 황해남도 신천군 석교리)로 이주하여 은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종 2품) 정현석 (鄭顯奭)과 해주 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동학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꾼 안중근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우덕순과 더불어 의군을 조직하였다.

 

 처음에는 회령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몇번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스파이의 거짓 안내와 병력 열세 등 모든 면에서 불리했기에 결국 패배하고 우덕순은 일본군에 잡히고 자신과 몇 몇 동료들만 목숨만 건져 가까스로 살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 뒤로 가까스로 남은 11명의 동지들을 모아서 약지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회를 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처치하기로 맹세한다.

 

이토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이 유명하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조도선, 유동하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채가구)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 FN M1900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혹시 몰라 4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3발 모두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

 

안중근의 저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즉시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열차 안으로 옮겨졌지만 저격당한지 30분만에 사망했고, 일본 정부는 이토의 장례를 국장으로 후하게 치러줬으며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 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삼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아래 법률적 평가 문단에서 나오듯 일제의 압력을 따른 러시아측 행정명령에 따라 러시아 검찰 조사 도중 하얼빈 일본 영사관을 거쳐 뤼순(현재는 다롄의 일부)에 있는 일본 고등법원으로 송치되고 만다.

의거 소식이 들리자 한국인 안병찬은 물론 러시아의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라스, 스페인 변호사,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수많은 국제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임은 불허되었고, 일제 측의 형식적인 절차로 관선변호사인 미즈노 키치타로와 카마타 쇼지가 변론을 맡는다. 재판장은 마나베 주조, 검사는 미조부치 다카오가 각각 맡았다.

 

1910년 2월 14일에 마나베 쥬조 재판장은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법정을 자신의 의견을 펼칠 장으로 보고 있던 안중근은 항소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를 존경하던 미즈노는 이를 제지하면서 "항소하면 조선의 지사가 목숨을 구걸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겠느냐"고 했고, 안 의사는 여기에 동의해 항소를 포기했다고 하며, 수감 뒤 서예와 <동양평화론> 집필에 몰두했다. 이후 3월 26일오전 9시에 정근, 공근과 마지막 면회를 가졌다가 10시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본인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총살형을 일제에 요구했으나 일제에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이 때 나이 32세였으며, 조선인들에게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자신을 존경하던 전옥 쿠리하라 사다키치, 변호사 미즈노 키치타로 등 사형에 입회한 사람들에게는 "여러분께서는 앞으로 동양 평화에 진력해 달라"는 말을 남겼고, 이에 미즈노는 안 의사의 사형 직후 "동양 평화를 위해 만세 삼창을 하자"는 요청을 했으나 형무소측에 거부당했다.

그가 순국 후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 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끝끝내 넘겨주지 않았다. 유해는 뤼순 감옥 인근 죄수 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내용의 당시 러시아 신문 기사가 발견되었다.

 

안타깝게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있다.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 국공내전에서 패전, 이후 공산 중국의 성립과 6.25 전쟁, 냉전으로 중국과 교류가 끊기다시피해 한국 측 주도로 찾는 것은 사실상 기대할 수가 없어졌다. 현재 안중근 매장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론 둥산포, 원보산, 뤼순감옥 박물관 부지 3곳이며, 특히 원보산은 당시 뤼순감옥 전옥(소장)인 쿠리하라 사다키치의 딸 이마이 후사코의 증언 등을 토대로 2006년 남북공동조사단 등이 공식지목했다.

 

공산화된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한 북한의 경우 안중근을 높게 평한 김일성은 1970년대에 직접 주석 명령을 내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을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 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하나 둘 다 실패하였다.

 

사실 안중근의 집안이 통째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독립 운동 때문에 일가가 중국·미국·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에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외국에 살고 있어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이 집안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의 고명딸 안현생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2010년 3월 25일에야 '해방 후 귀국해서 1953년 ~ 1956년에 효성여자대학교(現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는 공식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이후 안중근의 장남 안문생(안분도)은 어린 시절 길에서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중독돼 일찍 죽었고 그리고 이것 때문인지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이후 변절,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 文吉)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고, 나중에 소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찰에서 이토 분키치에게 공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저질렀다.[57] 이 일은 친일 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이에 분노한 김구가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고 백범일지에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