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 2월 23일 출생
1894년 3월 28일 사망 (향년 43세)
김옥균
조선 고종 시기의 정치가, 개화사상가.
1851년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계몽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서구 문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급진개화 세력에 참여하여 1884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동했으나 실패하고, 국외로 도피했으나 홍종우에 의해 피살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계몽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고, 17만 원의 차관을 받아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후 일본을 배워 급진적인 프랑스식 개혁을 주장했다.
일본으로 직접 건너간 김옥균은 청불전쟁의 동향을 미리 살펴보는 일본 정부로부터 당시 300만 원의 차관을 받아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통해 용병을 교섭하려 했지만 차관 교섭에서 실패했다.
차관 교섭 실패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급진 개화파는 동력을 상실하고 민씨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불을 내고 정적들을 제거하는 와중에 수구파로 전향한 옛 동지 민영익도 다쳐 정동 미국 공사관으로 후송된다. 이후 김옥균은 스스로 호조참판의 자리에 올라 개혁을 공표한다.
하지만 창덕궁에 원세개의 청나라군 1,500여 명이 들이닥친다. 이를 막아야 할 일본군은 매우 소수에 불과했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지원 약속을 어겼다.
급히 몸을 피한 개화파들은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에 올라 일본으로 도주했고 김옥균은 개명 후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정변에 적극 가담한 김옥균의 형제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연좌죄를 물어 떼죽음을 당했다. 친아버지 김병태(金炳台)는 정변 한 달 뒤인 1885년 1월 체포되어 천안옥사에서 10년간 복역하다가, 도피 생활을 하던 아들 김옥균이 암살 당한 시신으로 돌아와 부관참시된 지 한 달 뒤 고종의 명에 따라 1894년 73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생 김각균(金珏均) 역시 감옥에서 옥사하고 어머니는 음독자살했다. 여동생 김균은 죽은 것으로 위장해 겨우 몸만 피한 뒤 지방을 떠돌며 어렵게 살다 서천군 판교에서 1941년 사망할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일본 망명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秋作)'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일본인으로 지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역적인 김옥균을 가만두지 않았다.
일본에 2번이나 송환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인 지운영을 몰래 일본으로 보내 김옥균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고, 지운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추방당했다.
청일 양국은 김옥균의 신변 문제로 계속 부딪혔으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신변 보호를 이유로 오가사와라 섬, 홋카이도 옆 낙도 등에 보냈다.
이 시기부터 김옥균은 난잡한 여성 관계와 유흥에 빠졌다. 망명 직후 기거하며 신세를 지던 '야마구치 신타로' 집의 모친과 관계를 맺어 임신시켰고 온천과 여관을 오가며 홍등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오타루에서 사귄 일본 기생을 데려다 동거에 들어가 살림을 차린 뒤에 한량처럼 지냈다. 이때 동지이자 절친한 후배 박영효가 김옥균을 보고 사람이 변했다며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조선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바보 흉내를 내라”는 친구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는 말도 있다.
청나라
그러던 김옥균은 1894년 당시 주일 청국 공사 이경방(이홍장의 양자)의 설득에 따라 청나라로 건너갔다.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해 서양의 침략에 맞서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이홍장에게 설파하려는 의도였다.
회동 약속 하루 전인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오후 2시에 낮잠을 자던 김옥균은 수구당 민영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하였다.
김옥균은 프랑스 유학파이자 갑신정변 때 죽은 동지 홍영식의 친척인 홍종우를 의심하지 않고 곁에 두었다. 암살당하기 직전 김옥균은 호텔 방에 짐을 풀고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으며 홍종우가 꺼내 쏜 권총에 3발을 맞고 절명했다고 보고됐다.
1894년 양력 4월 14일 김옥균의 시신이 조선으로 송환되었고 곧바로 양화진 백사장에서 거열되어 찢어진 후 목과 손발 하나씩이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써갈겨진 천과 함께 효수되었으며, 시신의 나머지는 발가벗겨 칼질을 한 다음 옆에 버려졌다.
평가
김옥균에 관한 평가에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당시 조선 정국에 비추어 선구자적으로 시세를 파악했던 개화사상가로서의 면모, 청의 내정 간섭을 배제하고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자 했던 갑신정변의 의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으며, 일본을 맹신하고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나, 민중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일본의 지원이 떨어지자 청나라의 반격으로 정변을 실패했다는 점 등에서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8xUObXFuQ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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