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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 3월 31일 일요일

행복한우주먼지 2024. 4. 1. 00:16

이애리수

 

1910년 1월 1일 출생

2009년 3월 31일 사망 (향년 99세)

 

일제강점기 시절에 활동했던 한반도의 연극배우, 가수.

 

1910년 1월 1일, 경기도 개성시 출생이다.

 

외삼촌인 희극배우 전경희의 영향을 받아 유년 시절인 9세가 되던 해에 신파극단인 신극좌에 입단하면서 데뷔하여, 배우 및 가수로 활동하며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고, 1922년 민중극단을 거쳐 18세에 취성좌(聚星座)라는 극악단에서 '황성옛터'를 불렀고, 1931년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음반을 발표해 50,000장을 판매했다.

 

당시 오디오가 엄청난 고가라 이를 보유한 가구가 적었던 때였으므로 50,000장은 엄청난 양이었다.

1932년 연희전문학교의 재학생이었던 배동필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씨 집안에서 심하게 반대를 했다.

 

그러자 그녀는 급기야 1933년 음독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배씨 집안이 결혼을 허락해 슬하에 2남 7녀를 두게 되었다.

 

결혼 조건으로 연예계 은퇴를 요구했기 때문에 1930년 조선연극사, 1932년 태양극단, 1934년 4월 마지막 음반인 <꽃각시 설움> 발매하고 이후로 은퇴했고, 이후로는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삶을 살며 배동필과 해로했다.

 

그래도 남편 배동필이 공장을 운영했었기 때문에 여유있는 삶을 산 것으로 보였지만, 1950년 6.25 전쟁으로 한동안 가세가 기울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1960년대까지는 "가정주부로 지내고 있다"는 식의 근황이 나오곤 했지만, 노년기가 되면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이애리수 본인과 가족들이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이유로 TV 방송 출연과 언론 인터뷰 요청을 지속적으로 거절했었다. 자식들도 "어머니가 직접 '과거에 가수 활동을 했다'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가수였던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다

 

이후로 안산시로 이주하며 큰아들과 함께 살았고, 한복을 입고 산책을 하곤 해서 동네 주민들에게 '한복 할머니'로 알려진 듯하지만, 이애리수가 가수 활동한지 너무 오래된 탓에 눈치를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2008년 경기도 고양시 소재 요양병원에서 생존해 있음이 전해져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고사 중이었으나 2009년 3월 31일 해당 요양병원에서 향년 9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C8fYLSPIO4

 

〈황성의 적〉(荒城의 跡), 또는 〈황성옛터〉는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1928년 발표된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의 대중가요로, 한국인이 첫 번째로 작사와 작곡을 한 대중가요이다.

 

이애리수가 신일선 다음으로 〈황성옛터〉를 부르기 시작하고, 〈황성옛터〉는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배우로 활동했던 이애리수는 〈황성옛터〉를 단성사에서 불렀는데 관객들은 이애리수에게 함성을 보내는 동시에 망국의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불리게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이 곡을 금지시키고, 부르는 조선인을 족족 처벌하였으나,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일본에 대한 맞섬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된다.

 

이후 1932년 이애리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레코드로 〈황성옛터〉를 취입하였고, 1개월 동안 5만장이 판매되었다.

 

당시 레코드와 유성기가 서민들의 물건이 아닌 것을 감안했을 때, 이는 5만장보다 더 큰 가치이다. 〈황성옛터〉의 파급력은 다음해인 1933년까지 계속된다. 1933년에 이애리수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배우 겸 가수였던 이경설은 〈고성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황성옛터의 가사를 그대로 가져와서 불렀으나, 〈황성옛터〉를 부르는 것이 금지가 되었듯이, 〈고성의 밤〉은 발매 즉시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처분되고 회수당하기도 하였다.

 

〈황성옛터〉는 이애리수의 인기까지 드높이게 했는데, 이애리수의 명성이 떨어지고, 이난영, 왕수복, 선우일선 등 신예 가수들이 대거 연예계에 뛰어드는 1935년에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10대 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했을 때,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1년이 넘었음에도 10위권 안에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