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
1905년 4월 8일 출생
1928년 10월 10일 사망 (향년 23세)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특이하게도 한반도나 중국 대륙·미국이 아닌 타이완 섬에서, 그리고 총이나 폭탄이 아닌 도검을 이용하여 일본 제국의 국구(國舅)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왕 암살을 시도했다.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때는 황해도 신천군 군청서기로 근무하기도 했고 1926년에 6.10 만세 운동과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범을 잡기 위해서는 범의 소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일본으로 건너가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라는 가명을 쓰면서 오사카에서 전기제작소의 직공, 메리야스 공장 노동자, 상점원 등으로 일하고 밤에는 상공전문학교를 다녔지만 일본에서 뜻을 펼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을 떠났다.
1927년 11월 기착지인 타이완 섬에 도착했다가 바로 상하이로 가는 것이 여의치 않아 타이중에 가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찻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타이완 섬의 항일운동가들과 손을 잡고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928년 5월 일본의 국구(쇼와 덴노의 장인이자 고준 황후의 친정아버지)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이 육군 특별검열사로 대만에 파견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는데 5월 14일 타이중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구니노미야가 탄 차에 뛰어올라 독을 묻힌 칼을 집어던졌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칼이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치고 운전사 등을 찌르는 데 그치면서 구니노미야는 대만 일정을 예정대로 모두 소화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조명하의 암살 시도는 일본에서 ‘7월 불경 사건’으로 불리면서 대서특필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당시 대만 총독 가미야마 만노신(上山満之進)이 사임했으며 이후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야마나시 한조가 조선인 '관리' 및 후속 조치 미흡으로 사임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편, 구니노미야는 사건 이후에도 공무를 계속 하다가 1929년 1월에 온천을 즐기기 위해 아타미로 이동하다가 맹장염이 발병했고 급히 도쿄로 후송되었으나 결국 1월 27일에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
비록 미수에 가까웠던 의거였지만 일본 황실의 구성원을 타겟으로 삼았던 점과 의거로 하여금 일본 정치 및 여론을 뒤흔들었다는 의의가 있다는 점에서 이봉창, 김지섭 등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심한 고문을 받다가 1928년 7월 18일 타이완 고등법원 법정에서 열린 특별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향년 24세.
여담
'꿀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역사) 4월 10일 수요일 (0) | 2024.04.10 |
---|---|
(오늘의 인물) 4월 9일 화요일 (0) | 2024.04.09 |
(오늘의 역사) 4월 7일 일요일 (1) | 2024.04.07 |
(오늘의 인물) 4월 5일 금요일 (0) | 2024.04.06 |
(오늘의 인물) 4월 4일 목요일 (1) | 2024.04.04 |